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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우리가 아이에게 유독 무심한 순간들_황인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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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단법인 동천 작성일23-11-06 15:52 조회3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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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이에게 유독 무심한 순간들

재단법인 동천 황인형  변호사


 10월을 지나며 2023년 한 해 동안 있었던 아동, 청소년, 미성년자와 관련된 판결문들을 되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아동의 태어난 즉시 출생 등록될 권리를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한 의미 있는 사례도 있었지만(2021헌마975),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의 소지죄로 형이 확정된 사람을 국가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이 공무담임권을 침해한다고 본, 납득하기 어려운 사례도 있었다(2020헌마1605).

 

 여러 판결 중 유독 나의 눈에 띈 것은, 의사가 의료행위에 관한 설명을 미성년자인 환자에 대하여 설명할 의무가 있는 것이 원칙이지만, 의사가 그 환자의 친권자나 법정대리인에게 의료행위에 관하여 설명하였다면, 그 설명이 미성년자인 환자에게 전달됨으로써 설명의무를 이행한 것이라고 본 판례였다(대법원 2020218925). 결론만 놓고 보면 마치 법원이 미성년자의 알 권리나 의견을 표명할 권리보다는 의사의 편의를 중시한 것처럼 보인다. 아동 권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역사의 걸림돌이 될 판결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이 판결에 대해 한 법률가는 언론사를 통해 앞으로는 의사가 모든 미성년 환자에 대해 의사결정능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판단해야 하는데 과연 진료현장에서 가능한 일일지 의문이고 진료현장에 상당한 혼란이 초래할 것이라고 평했다. 위 판결이, 의료행위에 관한 설명이 미성년자에게 전달되지 않아 미성년자의 의사가 배제될 것이 명백한 경우나, 미성년자가 의료행위에 대해 적극 거부의사를 보이는 경우처럼 직접 미성년자에게 의료행위를 설명하고 승낙을 받을 필요가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의사가 미성년자에게 의료행위에 관해 직접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부연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한 우려가 허상은 아닐 것이다. 이미 미성년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료 종사자들의 어려움은 잘 알려져 있다. 소아 응급환자 기피현상을 보도한 한 기사는 병원마다 방어진료를 하는 경향이 심화돼 소아 응급진료를 더욱 위축시키는 것 같다는 의료인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369). 이런 상황에서 현장의 부담이 가중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입장도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법원이 미성년자에 대한 의사의 설명의무를 원칙적으로 면제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판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제도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음에도 여러 어른들의 사정으로 그 문제를 풀기 어려울 때, 아동의 권리를 제한하는 방식의 손쉬운 해결책이 제시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예를 들어보자. 성범죄 피해를 당한 아동이 그 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하여 조사가 개시되는 경우, 가해자의 DNA 확보, 성병 감염 여부 확인, 상해사실 확인 등 증거수집을 위해서는 조기의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 의료적 신체검증은 수사기관이 단독으로 수행하기 어려워 병원에서 이루어지는데, 병원에 따라서는 내부 지침 등에 근거해서 이 때 반드시 법정대리인 기타 보호자의 동의를 받을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부모나 가족이 피해사실을 알게 될 것이 두려운 아동은 아예 신고 자체를 철회하고 싶어 하거나, 수사가 진행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 법은 고소권에 있어 연령에 따른 차이를 두지 않는다. 범죄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연령과 관계없이 누구나 독립하여 자신의 고소권을 행사하고, 사법절차를 통해 피해를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당초 아동이 피해사실을 신고하고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였음에도, 단지 신체검증에 관한 보호자 동의를 받을 수 없다는 사정에 의해 쉽게 그 의사가 좌절될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규칙이 달성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실체적 진실의 발견과 아동의 범죄피해 회복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질까?

 

 이런 예도 있다. 학대 피해를 당한 아동, 미혼부모라거나 부모의 사망, 질병, 이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원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들은 많은 경우 아동양육시설에 입소한다. 아동이 어쩌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할지 모르는 시설에 보내지면서도, 시설에 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아동에게 주어지지 않고, 당연히 아동의 의견을 듣는 과정도 없다. 아동은 낯설고 불안하기만 한 중대한 생의 변화를 마주하지만 그저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최근 아동양육시설 실태조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입소 전에 시설에 관해 무어라도 들은 이야기가 있냐는 설문 문항이 있었다. 그렇다고 답변한 아동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나중에는 질문하는 자체가 민망했다.

 

 되도록 아동의 원가정 회복을 우선하고 원가정으로부터의 분리가 불가피한 경우에는 최대한 일시적인 보호, 가정형 보호를 우선하여야 한다는 대안양육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은 그렇다 치자. 적어도 아동이 시설에 입소하기 전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물어 그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함이 옳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적 제약과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잘못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지난 2023. 10. 6.에는 보호출산제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내년 7월 시행될 예정이다. 국가는 부모에게 합법적인 양육포기를 허용하고, 아동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할 수 있게 한다. 아무리 보완책을 도입한다 하더라도, 부모의 일방적 결정이 내려지기만 하면 아동이 일평생에 걸쳐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보호출산제를 하더라도 아동이 출생증서의 공개를 청구할 권리가 있으므로, 나중에 자신의 부모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보호출산을 신청한 생모나 생부가 원치 않는다는 의사만 표하면 공개는 거부되고, 아동은 성인이 되어서도 영영 부모를 알 수 없게 된다.

 

 이토록 아동에게 가혹한 결정을 내리면서도, 그 요건이 사실상 사전 상담‘7일 숙려기간 도과에 그친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아동의 병원 외 출산을 막고, 궁극적으로는 아동이 유기되어 사망하는 일을 줄여보겠다는 입법 목적에 전적으로 수긍하더라도 지금의 보호출산제 법안에 동의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어째서 위기임신 부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도와보기도 전에 아동을 포기할 수 있는 선택지부터 제시하는가. 여러 복잡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결론은 돈이, 사람이, 시간이 들기 때문이고, 뭐라도 빠른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처음에 살펴보았던 판결은 아동의 알 권리, 의견을 표명할 권리를 감안하여 세심한 법리를 설시한 아동 인권 디딤돌 판결이라고 해야겠다. 미성년자에 대한 의사의 의료행위 설명도 분명 필요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응당 범죄의 책임을 묻고 피해를 딛고 일어서는 일, 자신의 뿌리를 알고, 자신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할 문제다. 아동의 삶에 있어서 이보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은 없을 것이지만, 우리는 유독 그런 순간에 무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