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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 [현장 스케치] "이 뼈가 내 뼈임을 널리 알려주시오~!" (이주언 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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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단법인 동천 작성일11-11-29 00:00 조회2,4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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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뼈가 내 뼈임을 널리 알려주시오~!
-좌충우돌 신체감정 동행기
 
이주언(재단법인 동천, 제41기 사법연수생)

사랑하는 엄니~

엄니가 메일 계정을 만드셨다고 해서 깜짝 놀랬어요. 자주 전화연락 안하는 딸래미 입장에서는 연락통로가 하나 더 생겼으니 좋긴 한데.. 메일은 자주 써야지 다짐해놓고도 또 그렇게 며칠이 지났네요. 
첫 번째 메일에서 제가 내일 좋은 일하러 가니까 갔다와서 말씀드리겠다고 했는데 기억하세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메일을 씁니다.

제가 연수원 4학기 시험을 마치고 재단법인 동천이라는 곳에서 일을 배우는건 알고 계시잖아요. 그곳은 여러 가지 공익활동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난민소송을 지원하는 일이고, 저도 난민 한분(M씨라고 할게요)의 소송을 돕고 있어요. 아무리 가족사이라도 난민의 출신국이나 이름을 밝힐 수 없으니 이해해주세요. 엄니는 믿지만, 네이버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난민소송은 자기나라에서 박해를 피해 우리나라로 온 외국인들을 우리나라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소송이에요. 제가 돕고 있는 M씨는 소수민족 출신인데 다수민족으로부터 차별받고 다수민족을 보호하는 군인들로부터 고문을 받아 자기나라를 떠나온 사람이에요. 마침 군인들로부터 고문을 받아 어깨뼈가 부러졌을 때 찍은 X레이가 있어서 그 X레이를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어요. 하지만 소송의 반대편인 우리나라 법무부는 X레이가 M씨의 몸을 찍은 것인지 믿을 수 없다고 다퉈서 판사님께서 지정해주신 병원에 가서 신체감정과 X레이 진료기록감정을 받아보기로 한 것이에요.

감정일 전날 병원으로 전화해서 M씨가 준비해야할 사항이 있는지 확인했더니 신분증을 챙겨오라고 하셨어요. 감정일 당일 날 병원 근처 지하철역에서 M씨, M씨의 친구 미티를 만났어요. 바로 원무과로 가서 신체감정 담당 직원을 만나 안내를 받아 접수를 하고, 감정을 해주실 의사선생님을 만났어요.   

의사선생님께서는 이미 X레이에 대한 진료기록감정을 마치신 상태였는데 X레이 필름에 나타난 표시만으로는 언제 찍은 것인지 확인이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사진에 나타나다시피 “1l-08”라는 표시가 문제인데 M씨가 주장하는 시기인 2008년 4월 중에서 4월은 확인이 안되어도 2008년은 표시에 나타나지 않냐고 제가 억지를 부렸는데 역시 의사선생님은 객관적인 분이시더군요. “08”만으로는 그것이 년인지, 월인지 알 수 없으므로 안된다고 하시더라구요.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표기하는 방식과 다르므로 자신은 모른다고 쓸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이 맞다 싶어서 더 이상 우기지 못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방글라데시로 날라가 X레이를 찍어준 가게에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신체감정을 받기 위해서 X레이를 다시 한번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초조한지.. 제 마음과 달리 M씨는 편안해보였어요. 거짓말이었다면 불안했겠죠? 저희가 가져간 X레이를 걸어두고 오늘 찍은 X레이를 비교해 보신 의사선생님께서 “동일한 사람 확실하네요!”라고 이야기하시는데 절로 환호성이 나왔답니다.

“동일하다”는 대답만으로 끝내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혹시 뭐 하나라도 재판에 도움이 될 만한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싶어서 의사선생님께 이것저것 질문을 했어요. 동일하다고 판단하신 근거가 무엇인지, 저희가 가져간 X레이가 언제 찍은 것인지 알 수 있는지, 아니라면 언제 입은 부상인지라도.. 의사선생님께서 어깨 상처가 아문 정도로 보아 최소 1년전에 찍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잠시 망설였어요. M씨가 입국한지 3년이 넘었으니 최소 1년 전에 찍은 것이라는 진술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 같았지만 혹여 사족이 되지는 않을까 염려되더라구요. 그래서 아는 변호사님들, 이 사건을 담당하시는 변호사님께 자문을 구하는 전화를 돌리면서 ‘당장 내년부터는 내가 변호사인데, 이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자문을 구한 결과 최소 1년전에 찍은 X레이라는 것, 그리고 앞서 진료기록 감정에 대해 말씀하셨던 X레이 필름에 나타난 표시는 국내 것이 아니라는 진술을 확보하기로 했어요. 그 사이에 의사선생님은 점심을 드시러 가셔서 30분 넘게 다시 돌아오시길 기다렸지요. 그 30분이 저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시간이었어요. M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의사선생님께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오늘 찍은 X레이에 남아있는 어깨 상처가 혹시 치료가 필요한 상태는 아닌지..
점심을 드시고 돌아온 의사선생님께 여쭤보니 다행히 지금 치료가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고 하셨어요.
  
오늘 M씨와 동행하면서 처음에는 한국 병원이니 한국어에 서툰 M씨에게 길동무를 해드리러 간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어를 알고, 소송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함께 간다면 난민 혼자서는 물어볼 수 없는 부분들까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원 근처에서 함께 늦은 점심을 먹고 디저트로 커피를 마시며 페이스북 친구도 되고 사진도 서로 올리며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왔어요.
 
제가 한 일이 소송 전체에서는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한 사람을 알고, 친해지고, 그 사람의 삶에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집에 돌아오는 길이 참 뿌듯했어요. 이런 일이 제 직업이 된다면 저는 참 좋을텐데.. 엄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앞으로 메일 종종 주고 받아요 우리. 아부지랑은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으면서 좀 더 친해진 것 같은데.. 전화로는 닭살돋아서 하지 못하는 표현도 메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엄니를 무지 무지 무지 사랑하는거 아시죠?
다음에 또 메일 쓸게요!
 
- 가을의 끝자락에서 둘째딸 주언 올림.